Ⅰ. 제암리학살사건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가 점차 지속화․폭력화되자 일제는 보다 강력한 진압을 위해 일본군을 동원했다. 이미 3월 31일 발안장 시위가 있은 직후 경기도 장관과 수원군수에게 군대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일제는 가와바다 순사가 참살되는 격한 시위는 천도교가 주동
있음’이라는, 지극히 도식화된 전개에 불과하다. 전쟁의 내막이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은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무시되어 왔다. 100만이라는 피해자를 낸 민간인 학살을 그 중에서도 가장 금기시된 부분이었다.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과 그에 대한 교육 문제에 대해 서술하려고 한다.
머 리 말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전래에 찾아볼 수 없는 폭압적인 통치를 자행해 국내외 민족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까지 독립에 대한 염원을 키우게 했다. 그러한 염원을 바탕으로 3.1운동은 9년간 일제에 의해 형성된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전 민족이 독립 역량을 발휘해 일으킨 항
1. 3.1운동의 배경
1. 1910년대 후반 세계정세의 변화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체제에서 일어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물론 이것은 일제에 대한 우리민족의 저항의 산물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1910년 후반의 세계정세의 큰 변화가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그것이다. 독
학살사건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6․25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은 미군이 아닌 한국군 특무대(CIC)와 경찰에 의해 훨씬 잔혹하고 조직적이며 계획적으로 진행됐다
3. 노근리 사건 그 이후 -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대책위원회의 진상규명활동 성과
(1) 실화소설 출간과 문서증거자료 확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노근리 사건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였다.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과 사전해결을 위한 첫 시도는 정은용씨(현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대책위
학살했다. 학살 주체가 당시 이승만의 친위대였던 특무대(CIC)와 헌병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같은 반공주의 성격의 극단적인 우파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닌 철저히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
2005년 10월 31일 연합뉴스에 한국전쟁을 전후해 700∼800여건의 민간인 학살사건이 발생해 20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31일 시민단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에 따르면 1945∼1953년 동안 남한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조사한 결과 모두 700∼800여건
2005년 10월 31일 연합뉴스에 한국전쟁을 전후해 700∼800여건의 민간인 학살사건이 발생해 20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31일 시민단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에 따르면 1945∼1953년 동안 남한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조사한 결과 모두 700∼800여건
2) 그 외의 학살 사례들
ㄱ. 경북 예천군 산성리
51년 1월 19일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에서 세 차례에 걸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51명의 집단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미군은 학가산 자락에 위치해 있던 산성리가 인민군의 활동지역이라고 간주하고 폭격을 가했다. 당시 미군은 중공